감정노동자의 감정 연습 – 내 감정을 느끼는 것도 훈련입니다

작성일: 2025년 6월 19일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저는 어느 순간, 제 마음이 무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쁘거나 슬퍼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늘 괜찮은 척하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지요. 회복의 시작은 아주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 그 질문 하나가 제 안에 묻어두었던 감정의 언어를 다시 꺼내게 만들었습니다. 이 글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연습을 통해 점차 나를 회복해나간 여정을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잊고 지냈던 ‘진짜 나’와 다시 연결되기 위한 작지만 단단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1. 감정에 무감각해진 나, 질문 하나로 회복을 시작하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저는 타인의 감정에는 민감하면서도, 정작 제 감정에는 무관심하게 살아왔습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웃고, 물러서고, 참는 일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별일 아닌 듯 넘기고, 감정을 드러내는 건 민폐라 여기며 ‘괜찮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었죠. 그렇게 하루하루 감정을 눌러 담다 보니, 어느 순간 제 안의 감정이 흐릿해졌습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어딘가 저 멀리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고,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감정에 무뎌진 채 살아가던 어느 날, 문득 “나는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너무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 물음은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나의 내면을 조용히 흔드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질문 하나가 참 어려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를 버텼던 날들, 억울하거나 서운해도 내색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그저 피곤하다고만 느꼈던 날들의 피로감과 공허함은, 실은 내 감정을 돌보지 못한 결과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감정을 외면하고 억누르는 일에는 생각보다 큰 대가가 따릅니다. 마음이 닫히고, 관계가 흐려지고, 결국 나 자신을 잃게 됩니다. 저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아주 작고 조용한 질문으로부터 회복을 시작해보자고요. 매일 아침, 혹은 하루가 끝나는 저녁에 스스로에게 묻는 겁니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 이 짧은 문장이 제 감정을 다시 꺼내게 만들었고, 잊고 지냈던 저 자신과 다시 연결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회복은 그렇게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시작되었습니다.

2. 감정의 언어를 배우며 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회복의 첫걸음은 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감정노동자로 오랜 시간 살아오며 저는 늘 타인의 감정을 우선시해왔고, 제 감정은 늘 뒷전이었습니다. 고객의 불만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 업무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내 기분을 조용히 접어두던 습관, 이런 것들이 반복되며 제 감정은 점점 흐릿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들이 사라진 게 아니었습니다. 억누른 감정은 언제나 마음 어딘가에서 커다란 무게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무게는 쌓이고 쌓여, 결국 탈진과 무기력이라는 형태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왜 이렇게 지칠까’라는 질문을 반복하다가, 그 끝에 저는 감정 자체를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감정을 감추지 않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서툴렀습니다. 막연하게 답답한데도 무슨 감정인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고, ‘이게 짜증인지, 슬픔인지’조차 헷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아주 천천히 감정의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답답하다’, ‘속상하다’, ‘외롭다’, ‘불안하다’—그저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고 노트에 적어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점차 마음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중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 어떤 말에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그동안 스쳐지나갔던 감정의 결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은 실천은 놀랍게도 저를 조금씩 회복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고, 인정하는 일이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감정은 단지 기분이 아니라, 내 안의 생각, 욕구, 몸의 감각이 모두 얽혀 만들어낸 복합적인 언어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감정의 언어를 배우는 일은 곧 나를 배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요. 감정의 언어를 배우는 것, 그것이 저의 회복 여정에서 중요한 두 번째 걸음이었습니다.

3.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훈련, 낯설지만 따뜻한 연습

처음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생각보다 낯설고 두려웠습니다. 마음속은 분명 복잡하고 뭔가 답답한데, 막상 그것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습니다. 입을 떼려고 하면 목이 메이고, 마음은 더 움츠러들었습니다. 감정은 있는데, 말은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럴 땐 차라리 침묵이 편하다고 느끼기도 했지요. 하지만 침묵은 감정을 사라지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 어딘가에 더 깊은 외로움을 남겼습니다. 그때 저는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일단 저 자신에게라도 말해보자고 생각했지요.

그날부터 일기장 한 구석에 조심스럽게 단어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이유 없이 서운했다.” 그 한 문장을 쓰는 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막상 쓰고 나니 이상하게 눈물이 났습니다.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순간 저는 제 마음을 비로소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내 안의 감정을 꺼내주었고,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연습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그 글 속에서 스스로를 위로받았고, 내 마음을 내가 먼저 알아주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은 단순히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해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리고 표현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는 그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매일 한 문장씩 써 내려가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오늘 좀 속상했어”, “조금 외로워” 같은 말을 꺼내는 일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그 자체로 나를 돌보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말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감정으로 바뀌는 것을 느낍니다. 감정도 근육처럼 쓰면 단단해진다는 말, 저는 이제 그 뜻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4. 감정을 나누는 대화, 진짜 나를 만드는 용기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 다음 단계는, 그 감정을 누군가와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혼자서 일기장에 적고 되새기던 감정들을 이제는 입 밖으로 꺼내야 할 때가 왔다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처음엔 매우 두려웠습니다. 내 마음을 솔직히 드러냈다가 혹시 거절당하지 않을까, 상대가 불편해하거나 나를 다르게 보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결국 나의 약한 면을 보여주는 일처럼 느껴졌고, 그게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망설였지만, 작은 용기를 내 보기로 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아주 단순한 말부터였습니다. “오늘은 괜히 힘들었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 같았지만, 그 짧은 문장을 듣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더 많은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고, 어떤 해결책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 반응이, 오랜 시간 꽁꽁 싸매온 제 마음을 천천히 녹여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감정은 말로 나누면 흐르고, 흐르는 감정은 멈춰 있던 고통을 흘려보내며 치유로 이어진다는 것을요.

감정을 억누르고, 참고, 괜찮은 사람처럼 살아가려 애쓰던 저는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어색하거나 두렵지 않게 되었고, 감정을 나누는 일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진심을 담아 전한 말은 상대의 마음에도 닿고, 그 안에서 진짜 ‘연결’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감정을 숨기기보다, 좋은 ‘나’로 살아가기 위해 감정을 나누는 쪽을 선택하려 합니다. 감정을 나누는 대화는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연습이자, 진짜 나를 만들어가는 용기 있는 실천이었습니다.

5. 감정의 주도권을 되찾다 – 회복은 내가 나를 선택하는 일

감정 회복의 마지막 단계는 ‘감정의 주도권’을 제 손에 다시 쥐는 일이었습니다. 과거의 저는 타인의 감정에 반응하며 하루를 살아갔습니다. 누군가의 표정 하나에 하루 기분이 좌우되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휘청이곤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나 아닌 타인의 감정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저의 감정을 기준 삼아, 스스로를 이해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왜 기분이 나쁜지도 모르겠어’라는 막연한 혼란 속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오늘은 너무 지쳐서 예민했구나’라고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괜찮아요’라는 자동 응답 대신, ‘지금은 잠시 쉬고 싶어요’라고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사용하는 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중심축을 ‘남’이 아닌 ‘나’로 되돌려놓는 깊은 전환이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주는지 저는 매일 실감합니다. 감정은 언제나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그 신호를 들을 수 있게 되자 삶이 훨씬 선명해졌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이 감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솔직하게 답할 수 있는 하루하루가 저를 회복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제 저는 확신합니다.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나의 감정에 책임지고 반응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건강하고 단단한 회복의 길입니다. 그 길 위에 선 지금, 저는 비로소 나 자신을 선택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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