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의 감정 연습 – 내 감정을 느끼는 것도 훈련입니다

작성일: 2025년 6월 21일

감정노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이상한 습관이 생겼습니다. 타인의 감정에는 점점 더 민감해지는데, 정작 제 감정은 느끼지 못하거나 아예 무시하게 되는 겁니다. 누군가의 표정, 말투, 기분에는 민첩하게 반응하면서도,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에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라며 눌러버리기 일쑤였지요. 처음에는 그게 ‘프로페셔널함’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유 없이 무기력하고, 속이 답답한 날이 많아졌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데 눈물이 날 것 같은 날도 있었고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감정을 억누르고만 살았다는 걸요. 저는 이제야 비로소 ‘내 감정’을 느끼는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저처럼 감정노동 속에서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우는 훈련과정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부터였을까요. 누군가 “기분은 어때요?”라고 물었을 때, 저는 대답하기가 참 어려워졌습니다. 머릿속이 잠시 하얘지고,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늘 같았습니다. “괜찮아요.” 그 말은 마치 반사신경처럼 튀어나왔고, 저는 그 말을 한 뒤에야 문득 깨닫곤 했습니다. 정말 괜찮은 게 맞았는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게 익숙해져버린 것인지.

감정노동을 하는 삶 속에서, 제가 가장 먼저 잃어버린 건 다름 아닌 ‘내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상대방의 기분을 읽고, 그에 맞는 감정과 표정을 골라 연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제 감정은 배경처럼 밀려나 있었습니다. 기뻐도 겉으론 덤덤했고, 화가 나도 침묵했습니다. 서운해도 애써 웃었고, 슬퍼도 감정을 숨긴 채 웃으며 인사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나는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그게 버티는 방식이라 믿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면 약해 보일까 두려웠고, 나보다 타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무시와 억누름은 결국 저를 병들게 만드는 길이었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끼지 않으려 애쓰는 그 시간이야말로 내 마음에 가장 큰 상처였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감정도 근육처럼, 쓰지 않으면 점점 약해진다는 걸 저는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가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감정 훈련을 시작했을 때, 가장 당황스러웠던 순간은 내가 기뻤던 기억조차 또렷하게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속으로 웃었던 때가 언제였지?” 그 단순한 질문 앞에서 저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습니다. 웃긴 장면을 본 적은 있지만, 웃었다는 ‘감정’은 희미했고, 분노나 슬픔도 상황은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말로 옮기려니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을 다시 훈련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연습부터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루에 한 번, ‘오늘 나의 감정은 무엇이었는가’를 써보는 것. 내 기분을 다섯 글자로 요약해보거나, 아침에 눈을 뜨고 느껴진 감각을 단어로 표현해보는 것이었죠. 처음엔 정말 어색했습니다. 마치 낯선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서툴고 더듬거리기 일쑤였고, 어떤 날은 ‘모르겠다’는 한 줄로 끝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서서히 ‘느낄 줄 아는 나’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내 안에서 아주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의 숨소리가 느껴졌고, 작은 일에도 웃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을 느낀다는 건 어쩌면 다시 나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감정에 이름 붙이기 – 훈련의 첫걸음

우리가 힘든 이유는 감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감정들이 ‘이름 없는 혼란’으로 머물기 때문이라는 걸 저는 나중에서야 깨달았습니다. 한동안 저는 온갖 감정을 단 두 가지 표현으로만 처리했습니다. 속상하면 ‘화났다’고 말했고, 불안하면 ‘짜증나’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들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정이 정리되기보다는 점점 더 뿌옇게 뒤엉켰고, 그 혼란 속에서 저는 점점 무기력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느낀 감정이 과연 ‘슬픔’이었는지, ‘상실감’이었는지, 혹은 ‘버림받은 듯한 외로움’이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처음엔 막연하고 헷갈렸지만, 구체적인 단어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금씩 정리되어 갔습니다. 마치 혼란한 방에 물건 이름을 붙여 정돈하듯이, 감정에도 이름을 붙이는 일이 그 자체로 정화의 과정이 되더군요.

예전엔 감정을 억누르는 법만 익혀왔던 저였습니다. 울지 않기, 웃는 척하기, 참기. 그게 어른스러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로 꺼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의 회복’이라는 걸. 감정을 없애는 것이 치유가 아니라, 감정을 ‘살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회복의 시작임을 저는 지금, 비로소 배워가고 있습니다.

감정노동 현장에서 감정을 차단하게 되는 이유

제가 근무했던 복지기관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민원인을 응대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단순한 상담을 요청했고, 또 누군가는 도움을 애타게 구했으며, 어떤 날은 격앙된 분노를 온몸으로 쏟아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불쾌한 말투, 고함, 날 선 시선. 그 모든 반응들이 오롯이 나를 향할 때, 처음엔 흔들렸습니다. 상처도 받았고,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저는 무언가를 느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마음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슬프거나 억울하거나 당황스러운 순간이 와도 ‘아무렇지 않은 척’에 익숙해졌습니다. 감정을 느끼면 아프고, 공감하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점점 감정을 차단하는 일이 제 업무 루틴이 되었고, 저는 그게 직업적인 훈련이라 여겼습니다. 나를 지키는 방법이자, 감정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기쁜 일이 생겨도 기쁘지 않았고, 슬픈 소식을 들어도 울지 않았으며, 놀랄 만한 일이 있어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감정을 차단하는 능력은 분명 감정노동자에게는 생존 전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 내 감정의 감각 자체가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저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단련된 나의 몸과 마음은, 일상에서도 점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서웠습니다.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나를 보며, 이대로 괜찮은 건가 싶었습니다. 감정을 차단하는 건 나를 지키는 것 같지만, 동시에 나를 잃어가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제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회복은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요.

나만의 감정 일기를 써보기 시작했다

감정 회복을 위해 제가 가장 먼저 시도한 건 ‘감정 일기’를 써보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거창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그날 있었던 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을 단어 하나로 적어보는 것이 시작이었죠. ‘짜증’, ‘안도’, ‘섭섭함’, ‘혼란’ 같은 짧은 단어들. 말 그대로 조용히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 조각 하나를 기록하는 연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단어 하나씩 써나가면서 저는 아주 천천히, 잊고 있었던 나의 감정 세계로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을 글로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종이에 ‘당황’이라고 적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그 당황스러움을 일으킨 장면이 떠오르고, 그때의 나의 반응과 생각을 되짚게 되었습니다. 마치 감정을 말로 꺼내는 순간, 내 마음속 어딘가가 정리되기 시작하는 느낌이랄까요. 계속해서 적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 내가 유독 민감해지는지, 어떤 말에 쉽게 상처받는지, 어떤 순간에 마음이 따뜻해지는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감정이 올라오면 무조건 반사적으로 반응했지만, 이제는 한 번쯤 멈춰서 그 감정을 인식하고, 그 감정에 반응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정 일기를 쓰는 일은 결국 나를 살피는 일이었고, 나를 정리하는 시간이었으며, 나를 회복시키는 작지만 깊은 실천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감정과 다시 연결되는 소중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나의 마음에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훈련은 자기 존중의 첫걸음입니다

감정노동자로 살아오면서 저는 늘 누군가의 감정을 먼저 배려해야 했습니다. 민원인의 불안, 동료의 눈치, 조직의 분위기까지. 상대의 감정은 늘 제 최우선 과제였고, 제 감정은 언제나 그다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속이 상해도 내색하지 않고, 불편해도 애써 웃으며 넘기는 일이 하루의 루틴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제 감정은 늘 ‘보류’ 상태로 남아 있었고, 결국은 사라진 듯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릅니다. 저는 이제 압니다. 감정을 느끼는 훈련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라는 것을요.

이전의 저는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야지”라는 말을 마음속에서 수도 없이 되뇌었습니다. 그 말이 어른스러운 것 같았고, 참는 게 성숙한 대응이라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이 정도도 불편한 나를 내가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해.” 나의 불편함, 나의 상처,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말로 꺼내는 것, 그것이 곧 나를 존중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감정을 말할 수 있어야 나도 존중받을 수 있고, 내가 나를 존중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타인의 감정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감정 훈련을 통해 배웠습니다.

감정을 훈련하는 일은, 결국 내가 내 편이 되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갖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회복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시작되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그게 지금의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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