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5년 6월 15일
감정노동으로 탈진한 이후 회복을 경험했더라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 무너질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회복은 단지 멈추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순간부터 일상의 루틴으로 연결되어야 비로소 지속될 수 있습니다. ‘나’를 지키는 작고 구체적인 실천들, 매일 감정을 들여다보고 조율하는 루틴은 다시 탈진하지 않도록 돕는 방패가 되어줍니다. 이 글은 제가 직접 겪은 회복 이후의 루틴 만들기 경험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감정 회복의 방법을 함께 나누고자 씁니다.
1. 회복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한동안 쉬고 나니 정말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감정노동으로 탈진했던 그날들이, 밤마다 자책과 피로에 지쳐 눈물을 흘리던 제 모습이 마치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휴식은 분명 효과가 있었고,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잠시나마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이제 괜찮아졌다고 느꼈고, 더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회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속에는 또 다른 감정이 조용히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일하면 예전처럼 무너지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업무에 복귀한 첫 주, 평소처럼 출근해 일상으로 돌아가려 애썼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민원인의 무심한 말 한마디, “그 정도도 못 해요?”라는 문장이 제 마음에 칼날처럼 꽂혔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말에 눈앞이 흐려지고,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고, 회복되었다고 믿었던 저 자신이 다시 주저앉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중요한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회복은 단지 휴식이나 상담으로 완성되는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회복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그 안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 전략을 갖추고, 감정을 조율할 수 있는 루틴을 스스로 마련했을 때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외부의 치료와 도움도 중요하지만, 결국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깊이 실감하게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이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무너질 수 있는 나를 인정하고도 스스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힘을 키워야겠다고요. ‘나를 지키는 습관’을 만들어야겠다고요. 감정을 숨기거나 애써 참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루틴 속에서 나에게 안전한 틀을 만들고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회복을 이어가는 열쇠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저는 매일의 선택에 더욱 신중해졌습니다.
감정노동은 계속됩니다. 다시 업무에 복귀해도, 이전과 똑같은 상황은 반복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나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복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섰을 때의 나를 지켜주는 생활의 기술이자 태도입니다. 지금도 그 길을 배우는 중입니다.
2. ‘정서적 안정’을 위한 루틴이란 무엇일까요?
예전에는 ‘루틴’이라는 말이 너무 진부하고 뻔한 단어처럼 들렸습니다. 자기계발서나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다룬 책에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로, 저와는 거리가 먼 세계의 언어 같았습니다. 저는 늘 일정이 불규칙했고, 감정 기복도 심했으며, 감정노동으로 지친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규칙적으로 한다는 건 그저 이상적인 말처럼만 느껴졌습니다. 루틴은 여유 있는 사람들, 삶이 안정된 사람들이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탈진의 끝에서 겨우겨우 쉬며 회복을 경험한 후, 제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루틴은 단순한 습관이나 성공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매일같이 감정이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하루 전체가 망가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는 정서적 ‘앵커’였습니다. 출근 전 잠깐 감정을 점검하고, 퇴근 후에는 일에 대한 생각을 잠시라도 내려놓는 고요한 시간.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시간들이야말로 제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중심이자 숨 쉴 틈이었습니다.
루틴은 감정이 출렁이는 날에도 중심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감정 완충 장치’였습니다. 특히 감정노동을 반복하는 사람에게 루틴은 탈진의 경계선을 넘기 전에 스스로 감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나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줍니다. 반복되는 감정 소모 속에서도 자신을 회복 가능한 선에 머물게 하는 작은 신호이자, 그날의 감정을 정돈하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지금의 저는 거창한 루틴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다만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아침에 감정일기를 한 줄 써보고, 잠자기 전에는 스마트폰을 내려두고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아주 단순하지만 이 작은 반복들이 제 삶을 한결 안정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회복은 한 번의 휴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복이 다시 탈진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건 결국, 나만의 감정 루틴이라는 것을 저는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3. 내가 만든 루틴이 다시 나를 살립니다
제가 만든 루틴이 제게 어떤 변화를 줬을까요?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감정노동자는 하루 종일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상대방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일을 반복합니다. 속상해도 웃어야 하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설명할 기회조차 없이 넘어가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모든 순간은 내 감정을 외면하는 훈련이자, 스스로를 지워내는 반복이었습니다. 이런 날들 속에서 하루 중 단 10분이라도 진짜 나의 감정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절실했고, 그 시간을 루틴이 만들어주었습니다.
루틴은 저에게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 ‘이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이런 질문들을 예전엔 한 번도 제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루틴을 통해 그 질문들을 조금씩 해보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감정의 결이 점점 선명해졌습니다. 이제는 감정이 폭발하기 전에 미세한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함이 생겼고, 작은 스트레스에도 즉각 반응하는 대신 한 번 더 들여다보며 조율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 작은 루틴은 어느새 제게 정서적인 안전망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떤 날은 억눌렸던 마음을 털어놓는 통로가 되었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흔들린 감정을 되돌려 중심에 다시 세워주는 닻이 되었습니다. 감정노동자에게는 단단한 감정보다 오히려 흐트러진 감정을 되돌릴 수 있는 회복력이 더 필요합니다. 그 회복력을 키워준 것도 바로 이 루틴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루틴이 누군가의 지시나 강요가 아닌, 오직 저 스스로 제 삶의 버팀목이 되기 위해 만들어낸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그 점이 저를 더 자랑스럽게 만들어주었습니다.
4. 남들이 보는 회복이 아닌, 내가 느끼는 회복
누군가는 제게 말했습니다. “이젠 다 괜찮아 보여요. 예전보다 훨씬 밝아졌어요.” 그 말은 분명 위로와 응원의 진심에서 나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제 마음 어딘가엔 묘한 이질감이 자리 잡았습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진짜 회복이 끝난 건 아니라는 걸요. 밝아 보이는 얼굴 뒤에 여전히 흔들리는 마음이 있다는 걸, 웃음 이면에 얼어붙은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진짜 회복은 울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일한다고 해서, 예전처럼 웃는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은 외부에서 관찰되는 변화가 아니라, 내면에서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있는가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감정의 작은 떨림에도 민감하게 귀 기울이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 반응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진짜 회복의 본질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루를 마무리했지만, 마음속은 무감각하고 돌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반대로 어떤 날은 별일 아닌 일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는데, 그날은 오히려 내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알았습니다. 회복은 결코 선형적인 과정이 아니며, 어느 날은 좋아졌다가도 다시 무너질 수 있는 반복의 흐름이라는 걸요. 그래서 회복은 내 감정의 흐름을 존중하며,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남들이 생각하는 회복의 모습에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괜찮아 보여요”라는 말에도 웃으며 대답합니다. “네, 오늘은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내일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내 감정에게 물어봐야 해요.” 그렇게 저는 매일, 저의 감정과 함께 하루를 살아내고, 다시 회복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 여정이 진짜 회복이라고 믿습니다.
5. 당신도 당신만의 루틴을 만들 수 있어요
제가 실천했던 루틴이 모두에게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침에 감정을 써보는 일기, 퇴근 후 휴대폰을 무음으로 전환하는 습관, 커피 한 잔과 함께 맞이하는 고요한 시간. 이런 작은 루틴들이 저에게는 큰 회복의 기둥이 되어주었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어색하거나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노동자의 회복은 누가 만든 지침서를 따르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방식과 리듬을 스스로 찾아가는 아주 개인적인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루틴은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는 시간, 혼잣말로 내 감정을 정리하는 습관, 매일 손으로 따뜻한 말을 적어보는 일. 누군가는 명상을 통해, 또 누군가는 반려동물과의 산책을 통해 감정을 정돈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이걸 할 때 나는 조금 덜 힘들어’라는 감각입니다. 그 감각을 믿고 따라가 보는 것이 진짜 회복의 시작입니다.
루틴은 우리가 지켜야 할 엄격한 규칙이 아니라, 내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작은 울타리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습관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돌보는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감정노동자의 회복은 언제나 거창한 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작고 사소한 실천들로부터 시작됩니다.
혹시 아직 당신만의 루틴이 없다면, 오늘부터 아주 작은 것 하나만 시도해보세요. 숨을 깊이 쉬어보는 일, 오늘 하루의 감정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해보는 것. 어쩌면 처음엔 낯설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반복 속에서 당신만의 회복 언어와 감정의 리듬이 차곡차곡 쌓여갈 것입니다.
당신도 당신만의 루틴을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멋진 루틴이 아니라, 오직 당신 자신을 위한 따뜻하고 느슨한 회복의 루틴을요. 그 시작은 지금, 당신이 내딛는 이 아주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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