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5년 6월 15일
감정노동자의 회복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기적 같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아주 작은 루틴들을 실천하며 조금씩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감정일기를 쓰고, 나에게 솔직해지는 연습을 하고, 휴식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확보하면서 저는 점차 제 감정과 다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그 회복의 여정을 가능하게 해준 작고 소중한 습관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 준 실천들이었습니다.
1. 하루가 끝나면, 나는 텅 비어 있었다
퇴근 후, 늘 그랬습니다. 현장에서는 애써 웃고, 친절한 말투를 유지하고, 누군가의 불편과 불만을 받아내느라 하루 종일 긴장 속에 살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말이 없어졌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할 힘도, TV를 볼 여유도 없었고, 냉장고 문조차 열기 싫어 저녁을 건너뛰는 날이 많았습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몸은 분명히 살아 있지만, 마음은 텅 빈 껍데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지친 몸보다 더 힘든 건, 바로 마음의 공허함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타인의 감정을 받쳐주느라 내 감정은 돌볼 틈조차 없었고, 정작 나 스스로는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습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조용한 질문이 떠올랐지만, 그마저도 외면한 채 다시 다음 날을 준비하는 일상이 반복됐습니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았을 때 낯선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깨가 처지고, 눈빛이 흐려진 모습이 왠지 나와 닮지 않았습니다. “저게 나였나?”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왔지만, 정작 나는 왜 이렇게까지 텅 비어 있을까. 그 질문은 마음속에 작고 조용한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처음으로 ‘나를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조심스레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2. 회복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었다
한동안 저는 ‘회복’이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휴직을 하거나, 길게 여행을 떠나거나,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만 가능한 아주 큰 결단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변화가 있어야만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장 일을 그만둘 수도, 멀리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현장은 늘 사람 손이 부족했고, 누군가는 항상 제가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회복이라는 말이 사치처럼 느껴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회의 중에 “괜찮습니다”를 습관처럼 반복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 나한테조차 감정을 허락하지 않고 있구나.’ 감정노동이라는 건 단순히 힘든 일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조직이나 고객의 기대에 맞게 감정을 조절하고 표정을 ‘연기’해야 하는 노동입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감각이 무뎌지고, 결국 나 자신과의 연결이 끊겨버립니다.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회복은 거창하거나 특별한 변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매일 단 10분이라도 ‘나는 오늘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하고 조용히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 그 사소한 실천이 회복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감정의 끈을 다시 잇는 연습을 하면서, 저는 점점 저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3. 내가 써본 회복 루틴
회복을 위한 루틴이라고 해서 대단한 계획이나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제가 시작한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거창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작고 단순한 실천이 제 일상에 서서히 변화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완벽하게 하려고 애쓰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방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감정일기 쓰기였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줄이라도 써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오늘 민원 전화를 받고 답답했다’, ‘회의 중 아무도 내 말을 경청하지 않는 것 같아 외로웠다’ 같은 문장이었습니다. 짧고 투박했지만, 종이에 감정을 적는 그 순간, 내 안에 갇혀 있던 마음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정을 언어로 꺼낸다는 건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온전한 10분’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 속에서도, 단 10분만이라도 나를 위해 시간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핸드폰도 내려놓고, 커피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처음엔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했고, ‘이렇게 쉬어도 되나?’라는 죄책감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계속 지켜가자, 마음속에 잔잔한 숨구멍이 열리는 듯한 감각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감정을 말로 표현해보는 연습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힘들어요”, “그 말이 제겐 상처가 됐어요”처럼, 나의 기분을 말하는 것. 두렵고 망설여졌지만, 계속 감정을 눌러두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걸 알게 되면서 용기를 냈습니다. 처음에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말하는 순간 상대와의 거리도 달라졌고, 무엇보다 제 마음이 이전보다 덜 무너졌습니다.
이 세 가지 실천—감정일기 쓰기, 10분의 온전한 쉼, 감정 표현 연습—를 매일 반복하면서 저는 점점 회복의 근력을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꾸준히 쌓인 사소한 루틴들이, 생각보다 더 깊은 회복을 만들어주었습니다.
4. 감정은 연습을 통해 회복됩니다
처음에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누군가 앞에서 “지금 좀 힘들어요”라고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마치 나의 약점이나 나약함을 들키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루를 마무리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은 척’이 오히려 저를 더 외롭게 만들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면에서는 점점 고립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부터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감정 표현은 단순한 감성의 발현이 아니라, 감정노동자에게는 자기방어이자 생존의 도구입니다. 말로 내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타인과의 건강한 경계를 설정하고, 더 이상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기 위한 보호막이었습니다. 억누르기만 했던 감정은 결국 몸과 마음의 경고음으로 돌아왔고, 표현이라는 작은 실천이야말로 그 악순환을 멈추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알게 됐습니다. 회복이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전환점이 아니라, 매일 반복 가능한 ‘지속 가능한 습관’이라는 것을요.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명상을 하는 것도 물론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 일상 속에서 감정을 알아차리고, 나를 돌보는 시간을 스스로 허락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정직하게 바라보며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회복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배웠습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태도’였고, 나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압니다. 다시 이 자리에 서기까지 필요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나 용기가 아니라, 그저 매일 조금씩 나를 들여다보는 꾸준한 루틴이었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훈련, 표현하는 연습, 멈춰 서는 용기. 그런 반복들이 결국 저를 회복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감정은 연습을 통해 회복됩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도 다시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힘입니다.
5. 오늘 하루, 나를 먼저 챙겼나요?
오늘 하루, 당신은 누구의 감정을 가장 먼저 돌보셨나요? 고객의 짜증 섞인 말투, 상사의 날카로운 지적, 동료의 불안한 얼굴.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타인의 감정에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이해하고, 달래고, 받아주는 일이 익숙해지다 보면, 정작 내 감정은 가장 마지막 순서로 밀려나기 쉽습니다. 아니, 아예 빠져 있기도 하지요. 당신의 마음은 어디쯤 있었나요?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말해주듯, 우리는 감정을 다루는 일을 ‘일’로 수행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을 돌보는 일은 ‘사치’라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으니까”, “프로라면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지.” 그렇게 합리화하며 내 마음을 무시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느끼는 감정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몸은 그대로인데, 마음은 텅 빈 듯한 그런 상태 말입니다.
그럴 때, 저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습니다. “오늘 하루, 나는 나를 먼저 챙겼는가?” 처음엔 대답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대답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회복은 그 질문에서 시작됐습니다. 아주 작게라도 나를 챙기는 선택. 점심시간에 혼자 걸으며 숨을 돌리기, 커피 한 잔 앞에서 멍하니 있기, 감정일기 한 줄 쓰기. 그 어떤 것도 크진 않았지만, 모두가 나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도 감정노동자라면, 이 질문을 조용히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 나는 나를 먼저 챙겼는가?” 이 질문은 단지 하루를 반성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일을 준비하는 마음의 예고입니다. 이 질문을 자주 던질수록, 우리는 조금씩 자신을 잃지 않는 삶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나를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타인을 진심으로 돌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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