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이후에도 반복되는 탈진 – 이직 후에도 나를 괴롭히는 감정의 패턴을 마주하다

작성일: 2025년 6월 20일

이직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도 탈진은 반복되었고, 감정노동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이직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는 감정 피로의 원인을 되짚으며, 감정노동자의 탈진 순환을 멈추기 위한 방향을 고민합니다.

1. 떠났지만, 다시 지쳐갔다

새로운 일터에 들어선 첫날, 나는 조금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더는 예전처럼 무너지고 싶지 않았고, 새 출발을 통해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익숙한 감정이 다시 몰려왔습니다. 말없이 쌓이는 피로, 설명하기 힘든 무기력, 다시 시작된 감정의 억제. 다른 사람들은 나를 반갑게 대했지만, 나는 점점 말이 줄어들었고, 회의에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게 됐습니다. 몸은 달라진 환경에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감정노동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직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이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도대체 왜 또 지쳐가는 걸까? 이 물음이 계속해서 마음속을 떠돌았습니다. 떠났지만, 달라지지 않은 무언가가 나를 다시 탈진으로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2. 탈진의 순환은 구조에서 시작된다

감정노동자의 탈진은 단순히 개인의 성격이나 체력이 약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고 구조적인 반복의 결과입니다. 많은 이들이 탈진의 해결책으로 이직을 선택하지만, 저는 경험을 통해 그것이 근본적인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같은 방식의 감정 억제, 일방적인 공감 요구, 고객 중심의 무조건적인 친절이 당연한 듯 요구되었습니다. 감정노동의 구조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탈진은 이름만 바꾼 채 다시 나를 찾아옵니다. 문제는 우리가 ‘회복’을 오직 이직이라는 물리적 이동에만 걸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작 필요한 건 감정을 다룰 수 있는 시간, 조절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지원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회복의 과정은 보장되지 않은 채, 새로운 업무에 빠르게 적응하라는 압박만 존재합니다. 결국 저는 또다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스스로를 조이는 환경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전의 탈진은 무기력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고, 저는 같은 고리를 다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다른 직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탈진의 구조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진정한 회복이란 단순한 환경의 변화가 아닌, 감정을 마주하고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받는 구조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절실하게 배웠습니다.

3. 감정 회복 없는 이직은 또 다른 탈진을 만든다

나는 처음으로 이직을 결심했을 때, 이전 직장에서 받은 감정적 상처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마치 쫓기듯 그 자리를 벗어났고, 새로운 환경이라면 분명 나아질 거라는 희망 하나만 붙잡고 다음 일터에 발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시간을 멈춘 채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었고, 회복은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는 걸 곧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직장에서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 기대와 다른 피드백 하나에도 나는 쉽게 상처받았고, 그 감정은 마치 오래전 감정의 파편들이 다시 살아나는 듯 날카롭게 되돌아왔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내면은 과거의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덧입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저는 회복이 단순히 직장을 떠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감정노동에서 벗어난다는 건, 물리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보다 먼저 감정적으로 자신을 정리하고 돌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감정이 상처받았던 순간들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환경에 진입하면, 결국 나는 또 다른 탈진의 고리를 반복하게 됩니다. 회복이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꾹 눌러왔던 감정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그것이 왜 아팠는지, 어떤 부분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를 스스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진정한 회복의 방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감정노동에서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진심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직장이든, 어떤 환경이든 우리는 결국 다시 같은 탈진의 늪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4. 탈진의 순환 고리를 끊는 첫 걸음

나는 더 이상 이 감정의 순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직장을 가도 다시 탈진하고,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하면 또 무기력에 빠지는 그 고리를 끊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전과는 다르게, 내 감정에 먼저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낯설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 “내가 왜 이렇게까지 지쳤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조차 어려웠습니다. 오랫동안 타인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내 감정은 억누르며 살아왔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매일 조금씩, 짧게라도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고, 내가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솔직하게 적어보았습니다. 그렇게 매일 나를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다 보니, 감정의 흐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나를 지치게 했던 구조 속에서 ‘거절’이라는 작고 낯선 실천도 시작했습니다. 무리한 부탁에는 예전처럼 웃으며 받아들이는 대신 조심스럽게 거절해보았고, 억지로 감정을 숨기기보다 “지금은 어렵습니다”라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타인의 눈치를 보게 되고, 죄책감이 밀려올 때도 있었지만, 그런 작고 조용한 실천들이 탈진의 순환 고리를 조금씩 느슨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감정노동자는 누구보다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무너지고, 더 깊게 소진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배려의 방향을 나 자신에게도 돌려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회복은 큰 결단이 아닙니다. 내 감정을 들어주고, 지켜주기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작은 행동들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 바로 그 선택들이 모여 진짜 회복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나를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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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예고
7편 – 나를 되찾는 첫 걸음: 감정노동자의 자기돌봄 전략
감정을 잃어버렸다고 느낄 때, 우리는 어디서부터 회복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작고 구체적인 자기돌봄의 실천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