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5년 6월 20일
이직은 어느 날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노동자에게는 쌓이고 쌓인 감정의 응축이 한순간에 터지는 시점이 있을 뿐입니다. 이 글은 제가 실제로 이직을 결심하게 된 그날의 감정기록을 바탕으로, 감정노동자가 놓이게 되는 심리적 임계점을 들여다봅니다.
1. 그날 아침, 나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출근길에 발걸음은 이미 무거웠습니다. 버스에 몸을 실으며 ‘오늘 하루는 무사히 지나가기를’ 조용히 바랐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평소처럼 들려오던 동료들의 인사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책상 앞에 앉자마자 심장은 뛰기 시작했고, 손끝은 차가웠습니다. 오전 업무는 무난했지만, 점심시간 무렵, 동료의 무심한 한마디—“그거 아직도 못 끝냈어요?”—는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순간 제 안의 모든 감정의 뚝이 무너졌습니다. 오후에는 이용자 불만 전화가 계속되었고, 저는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대응했습니다. 겉으론 미소 짓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퇴근길, 버스 창밖을 보며 문득 손이 떨리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처음으로 ‘이직’을 결심했습니다. 누가 밀어붙이지 않아도, 저는 스스로 한계를 느낀 것입니다.
2.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수백 개의 쌓임이었다
“그 정도 일로 회사를 그만두는 건 너무 예민한 거 아니에요?”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저는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날 하루가 전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말과 행동 속에서 저는 조금씩 침식당하고 있었습니다. 정중한 말투에 숨은 무시, 반복되는 애매한 지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들, 고객의 짜증과 무례함이 제게 향할 때마다 저는 감정을 삼켰습니다. ‘이 일은 원래 그런 거야’, ‘누구나 다 참고 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견디다 보니, 어느새 고통에 둔감해진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회복이 아니라 감정의 포기였습니다. 수백 번 반복된 무시와 외면은 결국 내면의 균열을 만들고, 어느 날 갑자기 작은 자극 하나에도 무너져 내리게 합니다. 이직을 결심하게 만드는 건 단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나 자신을 외면해온 결과라는 사실을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3. 감정기록을 남기고 나서야 보이는 진짜 이유
이직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저는 하루 중 가장 괴로웠던 순간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첩에, 휴대폰 메모에, 노트북에 짧게 적어 내려간 문장들이 쌓이면서 놀랍게도 저의 감정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힘들었던 이유는 단순히 일이 많아서도, 사람들과의 갈등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진짜 이유는 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던 구조였습니다. 항상 참아야 했고, 내색하지 말아야 했고, 감정을 들키면 안 된다는 분위기 속에서 저는 스스로를 점점 지워갔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억누르다 보니 감정은 말라가고, 몸과 마음은 병들어 갔습니다. 감정기록을 통해 저는 비로소 제가 얼마나 오래 참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저를 상하게 했는지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 즉 ‘이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4. 이직을 결심하는 건 약함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예전의 저는 이직을 고민하는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너무 오래 참고 견딘 저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감정노동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을 조절하고 억제해야 합니다. 고객의 말에 공감해야 하고, 상사의 부당함에도 침묵해야 하며, 동료의 무례에도 미소를 지어야 합니다. 그렇게 쌓인 감정은 결국 탈진으로 이어지고, 탈진은 삶 전체를 잠식하게 됩니다. 이직은 도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노동자가 자신의 감정을 보호하고, 다시 삶의 균형을 찾아가기 위한 생존의 전략입니다. 저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날, 제 감정의 끝을 마주하고 떠나기로 한 결정은 제 삶을 구했습니다. 감정노동자는 누구보다 감정에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감정을 지키기 위한 이직을 결심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이며, 그 선택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다음 편 예고
👉 감정노동 칼럼 시리즈 모아보기
5편 – 탈진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무기력함, 성과감 저하, 그리고 자책… 정서적 소진은 결코 개인의 탓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를 함께 들여다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