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5년 7월 15일
감정노동을 오래 하다 보면 사과가 습관처럼 입에 붙습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죄송합니다”가 먼저 나옵니다. 이 글은 감정노동자가 왜 죄책감에 익숙해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자신을 해치는지 탐색하며 ‘사과 반사’를 멈추는 방법을 함께 고민합니다.
1. 사과는 방어기제였다 – 자동 반응으로 자리 잡은 죄송합니다
감정노동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몸에 밴 말은 “죄송합니다”였습니다. 고객이 불만을 토로하거나 목소리를 높이기만 해도 저는 반사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시스템 오류였든, 배송 지연이었든, 회사 정책 때문이었든 관계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대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느 날은 고객이 대기 시간이 길다며 격분했고, 저는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수습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서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건 내 책임이 아니잖아. 그 억울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기도 했지만, 저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사과는 그 상황을 가장 빠르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나를 보호하는 방패막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송합니다”는 저의 반사적인 언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 말에는 감정도, 판단도 담기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모면하는 도구이자, 감정을 억누르는 일상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내가 잘못한 건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해야 하는 분위기여서 그런 건지조차 헷갈렸습니다. 사과의 주체가 나인지, 시스템인지, 아니면 조직의 문화인지 불분명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여전히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반복할수록, 나는 점점 더 작아졌고, 감정 표현은 더 멀어졌습니다. 감정노동자에게 사과란, 단지 상대방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조직의 책임을 떠안는 무거운 짐이었음을 이제야 인정하게 됩니다.
2. 죄책감은 감정노동자의 반사 신경이다 – 나를 탓하는 것이 익숙해진 이유
감정노동자의 삶에서는 ‘내 잘못이 아닌 상황’에도 쉽게 죄책감이 따라붙습니다. 고객이 불편을 겪으면 “내가 안내를 제대로 못했나?”, 상대가 화난 표정을 짓기만 해도 “내 말투에 문제가 있었나?” 하고 자책하게 됩니다. 이처럼 감정노동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해지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그 결과 자신의 감정과 기준은 점점 뒤로 밀리게 됩니다. 감정보다 관계 유지가 우선이 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일상이 되면서, 내 감정은 말보다 침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저 역시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껴도 좀처럼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상대가 무례했더라도 “혹시 내가 먼저 불편하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앞섰고, 말 한마디를 꺼내는 데에도 ‘민폐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저에게 “참 배려심 깊다”, “항상 웃고 있어서 편하다”고 말했지만, 그 칭찬은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더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나의 침묵이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소비될수록, 저는 점점 더 제 감정을 꺼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 억눌림은 피로와 분노로 내 안에 쌓여만 갔습니다.
죄책감이 일상이 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타인의 감정에 매번 책임을 느끼는 습관은 점차 자기 확신을 갉아먹고, 언젠가부터는 “나는 늘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잘못된 자아 인식으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감정노동자는 ‘남을 위한 좋은 사람’이 되려다,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가장 차가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회복의 시작은 바로 이 왜곡된 자아를 다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3. 나는 왜 자꾸 나를 탓하게 될까 – 죄책감의 뿌리를 찾아서
저는 상담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죄책감은 단지 직장에서의 사건 때문만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전,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반응이라는 것을요. 저는 어릴 적부터 늘 참는 아이였습니다. “참아야 착한 아이야”, “화를 내면 나쁜 아이가 되는 거야”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화가 나도 참고, 속상해도 꾹 눌렀습니다.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조용히 눈치를 보며 상황을 모면하는 게 익숙한 방식이 되었고, 이런 성향은 어른이 된 후에도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 내 안의 무의식은 감정노동이라는 환경 속에서 더 뚜렷해졌습니다. 고객의 기분을 우선시해야 하는 구조, 분노를 드러내면 ‘프로답지 못하다’는 평가, 그리고 감정을 드러냈을 때 되돌아오는 불이익. 이런 요소들이 제 안에 남아 있던 ‘감정 억제’의 패턴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저는 다시 그때처럼 조용히, 조심스럽게, 내 감정보다는 타인의 안정을 먼저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이런 삶을 오래 지속하다 보니, 저는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갔습니다. 실수를 하면 밤잠을 설쳤고, 누군가 인사 없이 지나가면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곱씹었습니다.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채, 그 감정을 고스란히 나에게 돌리며 죄책감 속에 머무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상담 과정에서 저는 이 모든 감정의 뿌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나’가 아닌, ‘그때의 나’에게서 비롯된 반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감정이 조금씩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누군가의 얼굴빛을 살피고,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릴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이 왜 생겼는지 알고 있고, 그 감정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은 더 이상 나를 압도하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감정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인식이 바로 제 회복의 첫 걸음이 되었습니다.
4. 더 이상 무조건 사과하지 않기로 – 나를 지키는 감정 경계 세우기
이제 저는 모든 상황에 자동적으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결심은 생각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처음엔 저도 모르게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가 많았고, 일부러 삼키면서 다른 문장을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결단은 저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상대가 화를 내면 ‘그게 내 잘못이든 아니든 일단 진정시키고 보자’는 심정으로 사과부터 꺼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정말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대신 “불편을 드려 죄송하지만,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내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감정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뒤 상대의 반응이 생각만큼 부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오히려 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누군가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고, 어떤 이는 제 말을 들으며 오히려 침착하게 문제를 풀어갔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과는 언제나 만능 해결책이 아니며, 때로는 나를 더 위축시키고 감정적으로 고립시키는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을요.
감정노동자는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지내기 쉽습니다. 늘 타인의 감정만을 우선하며 일하다 보면, 나의 감정은 늘 뒷전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과는 책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자기 부정의 습관처럼 굳어졌던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어느새 나는 스스로를 ‘항상 뭔가 부족한 사람’처럼 여기게 되었고, 그런 나를 점점 더 작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경계를 분명히 세우기로 했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책임지되, 그렇지 않은 부분까지 껴안으며 무너지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경계를 세운다는 건 누군가에게 무례해지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솔직해지겠다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모든 걸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 작은 연습이 쌓여 지금의 저를 조금씩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5. 나를 위한 말, 나를 위한 감정 –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연습
죄책감은 회복을 가장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가로막는 감정입니다. 겉보기엔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내면에서는 스스로를 끝없이 질책하며 자존감을 갉아먹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그 감정에 갇혀 살았습니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며칠씩 마음을 졸였고, 누군가의 표정 하나에도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부터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라, 반복된 감정노동 속에서 각인된 ‘죄책감 반사’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자동반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는 제 안의 목소리를 다시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예전엔 “내가 부족했나 봐”라고 말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괜찮아,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라고 저를 다독입니다.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해. 나는 지금 상처받았어”라고 말해주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감정노동자는 타인을 위해 말하고 웃고 행동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소외되는 존재는 정작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이렇게 나를 위하는 말, 나를 위한 감정을 회복하는 일은 결코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죄책감에 익숙했던 뇌는 여전히 가끔씩 옛 반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저는 다시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회복되지 않으면, 그 어떤 친절도 결국 나를 해치는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감정노동을 하면서 잃어버렸던 ‘진짜 나’를 되찾는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과로 시작되던 대화 대신,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일로 하루를 엽니다. 이전에는 “먼저 미안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꼈는지”를 먼저 살핍니다. 죄책감이 아닌 자존감으로 일할 수 있는 날들, 타인을 위한 역할이 아닌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순간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과부터 하는 나’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나’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런 내가 되기 위해, 오늘도 저는 제 마음속 깊은 곳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괜찮아, 너는 잘하고 있어.” 그 말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저는 나를 위한 삶을 조금씩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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