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5년 7월 15일
감정노동자는 늘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 아닌, 관계를 유지하고 감정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일 때가 많습니다. 이 글은 ‘괜찮다’는 말 속에 감춰진 진짜 감정들과, 그 거짓말이 만들어낸 내면 소외의 상처, 그리고 회복을 위한 첫 걸음을 다룹니다.
【1】“괜찮습니다”라는 말의 이면
감정노동을 오래 하다 보면 입에 가장 먼저 붙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괜찮습니다.” 무례한 말을 들어도, 실수를 내가 뒤집어써도, 억울한 상황에 휘말려도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괜찮아요”, “아닙니다, 별일 아니에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속으로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고, 억울하고 분해서 가슴이 답답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늘 같았습니다. 어쩌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정이 흔들릴 때조차도, 나는 내 감정을 숨기고 그 말을 먼저 내뱉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자주, 이렇게 쉽게 나 자신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걸까?” 그 물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오랜 억제의 습관에서 깨어나려는 첫 질문이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괜찮다’는 그 말 속에는 사실 아주 복잡한 감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빨리 넘기고 싶다’, ‘상대가 나를 불편해하지 않길 바란다’, ‘분위기를 더 이상 어지럽히고 싶지 않다’는 의도들이었죠. 말하자면, 그 말은 내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내 마음을 숨기는 표현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진짜로 괜찮다고 느껴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감정노동자로서 수많은 사람의 기분을 맞춰야 하는 일상 속에서 몸에 밴 사회적 방어기제, 즉 ‘문제를 만들지 않는 말’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괜찮다는 말은 어느 순간, 나를 지키는 말이 아니라 내 감정을 가리는 말이 되어 있었습니다.
【2】감정을 속이는 데 익숙해진 삶
감정노동자는 타인의 감정에 맞춰 자신을 조절하는 데 매우 익숙합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져 버립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속에서는 울고 싶은데도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하고, 억울하고 분한데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마음속에선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지금 말하면 안 돼’,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면 오히려 내가 손해야’라는 목소리가 매 순간 따라다녔습니다. 그렇게 감정을 참는 게 일상이 되다 보니, 나중에는 감정을 느끼는 일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슬프면서도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힘들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감정이 아닌 기능으로 하루를 버텼고, 감정을 외면한 채로 일하는 것에 무감각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지금 어떤 기분이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아무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지만 내 안은 텅 비어 있었던 거죠. 더 무서운 건, 이런 감정적 단절이 오래되면 언젠가부터 진심으로 내가 괜찮다고 믿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은 괜찮지 않은데, 너무 오랫동안 괜찮은 척을 하다 보니 그게 진짜 내 상태인 줄 착각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내면에서 일어난 거짓말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데려옵니다. 그 무너짐은 소리 없이 찾아와 나를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참 많이 참아왔구나’라는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3】진짜 내 마음은 언제부터 멀어졌을까?
저는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에서 문득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졌습니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진짜 마음을 숨기고 살게 된 걸까?” 마음속에서 울림처럼 맴도는 그 물음은, 제가 외면해왔던 수많은 기억을 불러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작은 거창하거나 극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억울한 지적을 받았을 때 말문이 막혀버렸던 그 순간, 마음이 불편했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억지로 웃었던 회식 자리, 몸이 아파서 쉬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버텼던 날들. 그런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반복되고 축적되면서, ‘괜찮다’는 말은 어느새 제 정체성처럼 굳어졌습니다. 그 말은 타인을 편하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국 나를 점점 더 고립시키는 무언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렇게 괜찮다고 말하는 일이 익숙해진 저는, 점차 ‘진짜 내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마저 잃어갔습니다. 마음이 불편해도 그것이 불편한 감정인지조차 몰랐고, 억울하거나 서운해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렇게 감정을 억제하고 억누르는 삶이 길어지자, 내 마음은 점점 더 안쪽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감정도 명확히 느끼지 못하는 상태. 바로 습관적 무반응이라는 고요한 감정 마비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괜찮다’고 말할수록 진짜 감정에서 멀어지고 있었고, 저는 그 거리감 속에서 조금씩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4】“괜찮지 않다”는 말을 다시 배우기까지
그래서 저는 어느 날 작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진짜 내 감정을 조금씩이라도 꺼내어 표현해보자고. 물론 그 첫걸음은 쉽지 않았습니다. “힘들어요”라는 말 한마디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낯설고 두려웠습니다. 그 말이 상대에게 무례하게 들리지 않을까, 혹은 제가 너무 약하고 감정에 치우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늘 이해하는 사람, 늘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왔던 저로서는 그 틀을 깨는 일이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결심한 만큼, 정말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회의 자리에서 “사실 저는 그 상황이 좀 속상했어요”라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았고, 지인과의 대화에서는 “지금은 괜찮지 않아요. 조금 쉬고 싶어요”라고 말해보았습니다.
처음엔 말문을 여는 것조차 어색했지만, 놀랍게도 그 진심 어린 표현에 상대는 불편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대화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저의 진짜 감정에 귀 기울이려는 태도, 조심스럽게 맞장구를 쳐주는 모습, 그 모든 것이 관계에 새로운 신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감정을 표현한다고 해서 관계가 틀어지거나 누군가가 나를 외면할 거라는 건 제 안의 막연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숨기지 않았을 때, 상대도 저를 더 배려하고 진심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괜찮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일은 관계를 망치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연결을 회복하는 시작이라는 것을요. 감정을 감추는 데 익숙했던 나에게, 솔직한 한마디는 내 마음을 되찾는 길이 되었습니다.
【5】괜찮다는 말 뒤에 숨지 않기로 했다
지금도 저는 여전히 “괜찮아요”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가 많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익숙해진 말버릇이라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무심결에, 또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자동처럼 그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는 그 말 뒤에 나의 진짜 마음을 무조건 숨기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말하더라도, 속으로는 반드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지금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그렇게 질문하는 과정 속에서 저는 조금씩 내 마음을 마주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괜찮지 않다면, 예전처럼 무시하거나 덮지 않습니다.
“힘들다”는 감정이 들면 인정해주고, “쉬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오면 가능한 한 받아들이려 노력합니다. 감정노동을 하며 수없이 나 자신을 감추고, 표정 뒤에 진심을 눌러 담으며 살아왔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 변화는 저에게 매우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소중한 경험입니다. 내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힘들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감정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되찾는 첫 걸음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씩 실감하고 있습니다. ‘괜찮다’는 말 뒤에 숨는 삶이 아니라, ‘괜찮지 않다’고 말하며도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삶. 그 삶이야말로 회복된 감정노동자가 가야 할 길임을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 힘들어요’, ‘지금은 쉬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나도 괜찮다는 걸, 저는 이제야 천천히 배워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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