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5년 7월 15일
감정노동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익숙한 피로와 탈진이 나를 덮쳐왔습니다. 회복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글은 다시 지쳐버린 나를 다정하게 붙잡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1. 회복했다고 믿은 순간, 다시 지쳐 있었다
한동안은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정을 마주하는 연습도 해보았고, 관계 안에서 나를 지키려는 시도도 분명 했습니다. 분노와 서운함을 이름 붙여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웃는 얼굴 뒤에 감춰졌던 감정들도 조금씩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회복했다고 믿었습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무너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익숙한 피로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유 없는 짜증과 무기력, 아무 일도 아닌데 눈물이 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회복은 ‘끝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나는 다시 지쳐 있었고, 그 피로는 더 조용하고 깊게 내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감정노동의 회복이 완결된 것처럼 믿고 나 자신에게서 눈을 돌렸던 그 사이, 나는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다시 무너지고 있었던 겁니다.
2. 익숙한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나를 발견하다
돌아보면, 다시 지치기 시작한 건 외부에서 온 새로운 자극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결국 내 안에 있었습니다. 회복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무언의 기대를 품고 있었고, 누군가를 배려하면서 또다시 나를 희생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전의 실천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법, 거리를 두는 연습,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는 과정들을 알고 있었지만, 바쁜 일상과 관계 속에서 그 연습을 멈춘 순간, 나는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웃는 얼굴 뒤로 감정을 눌러두는 모든 반응들이 무의식 중에 내 안에 되살아나 있었습니다.
회복 이후의 나는 오히려 더 단단해야 하고, 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또 다른 기준을 내세웠고, 그 기대는 이전보다 더 강하고 무거운 압박이 되어 나를 조용히 짓눌렀습니다. ‘회복된 사람이라면 이쯤은 잘 넘어가야지’라는 마음이 생기면서, 나는 또다시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지 않아야 할 것 같았고, 표현하면 다시 약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침묵은 내 마음을 다시 조용히 잠그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아주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소진시켜 갔습니다. 감정노동에서 벗어났다고 믿었던 나는, 사실 여전히 그 감정의 구조 안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나는 너무 늦게야 그 조용한 되돌아감의 패턴을 알아차렸고,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나는, 정말 회복된 나일까?”
3.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던 나의 조급함
나는 왜 다시 지치고 있는지를 곱씹으며 생각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애써 괜찮아지려는 나’가 있었습니다. 회복 이후에도 흔들리는 내가 실망스러웠고, 이쯤이면 괜찮아져야 하지 않나 스스로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울지 않으려 했고, 다시는 약해 보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조급함이 나를 또다시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회복은 곧 강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나를 잘 알아보는 연습이라는 걸 잊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여전히 힘들 수 있고, 여전히 서툴 수 있고, 때로는 감정에 휘둘릴 수도 있는 존재인데, 그 불완전함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감정을 회복했다는 이유로,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착각했던 그 태도가 나를 더 깊은 지침으로 이끌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을 목표로 하는 순간, 감정은 또다시 억눌리게 되었습니다.
4.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는 마음을 배우다
지금 나는 다시 처음처럼 감정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회복했다는 자부심 뒤에 숨어 있던 피로와 침묵을 마주한 뒤, 나는 다시 조용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앉아 나에게 묻습니다.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힘들게 했니?” 때로는 질문이 선명하게 들리지 않고, 대답도 흐릿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나를 나에게로 이끌고 있습니다. 감정은 즉답을 요구하지 않더군요. 그냥 그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일, 그리고 잠시 기다리는 일이 감정을 회복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실수합니다. 회복의 계단을 올라가다 다시 미끄러지고, 한참 잘하다가도 어느 날은 감정에 눌려 그대로 주저앉습니다.
예전 같으면 ‘나는 또 실패하고 있어’라고 자책했겠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괜찮아, 너도 피곤했을 거야.” “잠시 쉬어가도 돼.” 주저앉은 나를 채찍질하기보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연습을 합니다. 회복이라는 이름 아래서 나를 더 완벽하게 만들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나를 인정하고 끌어안는 일이 진짜 회복이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나는 다시 처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를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회복은 내가 얼마나 잘해내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나 자신에게 따뜻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그 과정을 조금씩 배우는 중입니다.
5. 회복은 상태가 아니라 방향이다
이제 나는 회복을 하나의 ‘완료된 상태’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회복이란 무언가를 끝마친 뒤에 도달하는 고요한 지점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느낍니다. 감정노동에서의 회복이란, 오늘 하루 내가 나에게 얼마나 집중했는지, 내 감정에 얼마나 솔직할 수 있었는지, 그 작은 용기들을 조금씩 회복해가는 ‘방향’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힘들다는 걸 인식하는 것, 그 마음을 표현할 언어를 찾는 것, 그리고 그 감정을 누군가에게 전하거나 스스로 받아들이는 일. 이 모든 과정들이 회복의 일부였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아마 여러 번 지칠 겁니다. 관계에 상처받고, 기대 없이 던져진 말에 마음이 무너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제는 그 무너짐이 곧 실패가 아니라는 걸 압니다.
내가 다시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면, 그건 충분히 회복의 일부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감정노동은 여전히 내 일상 곳곳에 숨어 있고, 어떤 날은 그 무게에 다시 눌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걸 외면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피하지 않고, 회복을 조급해하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계속 걸어가고 싶은 회복의 방향입니다. 언젠가 이 길이 끝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그 과정 속에 있는 내가 이미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일. 나는 그 말을,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 해주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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