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5년 6월 18일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감정노동의 본질이라면, 감정을 지켜내는 것은 회복의 핵심입니다. 저는 업무 속에서 내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 ‘나만의 언어’를 만들고, 표현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감정노동자가 자기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 배워야 했던 표현 방식과 루틴의 시작을 이야기합니다. 사소해 보여도, 그 실천은 감정 회복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었습니다.
1. 감정을 드러내면 약한 사람이라는 말
감정노동을 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겁니다.
“프로는 감정을 드러내면 안 돼요.”
이 말은 처음에는 누군가의 충고처럼 들렸습니다. 고객 앞에서는 친절해야 하고, 감정적으로 보이면 신뢰를 잃는다는 말.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말은 타인의 요구가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화가 나도 “괜찮아요”라고 말했고, 억울해도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넘겼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쌓이고 또 쌓이면서, 나는 점점 내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불편한 말을 해도 무표정으로 넘겼고, 힘든 일이 생겨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능력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깨달았습니다.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억눌린 채로 남아 있다가 어느 순간 몸에 나타나고 말투에 스며들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온다는 걸요.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이유 없이 나고, 아무 말에도 깊이 상처받는 자신을 마주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을 억누르는 게 회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부드럽게 인정하고, 내가 나에게 먼저 말해주는 일이 진짜 회복의 시작이었습니다.
“괜찮지 않다”는 고백이 약함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용기라는 것을.
2. 나는 왜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까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요?
“속상해요”, “지금 너무 불안해요”, “무시당한 것 같아 아파요”
이 간단한 문장들이 내 입에서는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는 분명히 감정이 있었는데,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는 이상하리만큼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감정은 숨기는 게 미덕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나빠도 웃고, 서러워도 꾹 참고, 울고 싶어도 삼켜야 했던 시절들. 특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돌봄노동자라는 이유로,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의 특성으로 인해 내 감정보다 상대방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길 기대받았습니다. “네가 더 강해야 한다”, “그 정도는 넘겨야 한다”는 말 속에서 내 감정은 점점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요.
감정은 표현되어야 해석되고, 말로 전달되어야 공감받을 수 있다는 것을요.
내가 내 감정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그것을 내 언어로 옮길 수 있어야 비로소 나 자신도 내 마음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매일 감정 단어 하나를 노트에 적기로 했습니다.
“오늘의 감정: 허탈함. 이유: 기대했던 회의에서 내 의견이 무시됐기 때문.”
이런 식의 짧은 기록을 꾸준히 남겼습니다.
놀랍게도 이 작은 루틴이 쌓이자, 어느새 감정이 나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고, 나는 더 이상 무기력한 감정의 수용자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고 돌볼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누가 감정을 묻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조금 힘들어요.” 이 한마디가, 감정노동의 순환을 멈추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3.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한 작은 루틴 만들기
감정을 회복하는 루틴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커피를 마시기 전, 오늘의 기분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기. 출근 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창밖 하늘을 잠깐 바라보는 것. 퇴근 후, 내 책상 앞에 앉아 “오늘도 잘 버텼어, 수고했어”라고 마음속으로 말해주는 것. 누군가 보기엔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내겐 내 감정을 잃지 않게 해주는 작고 단단한 장치들이었습니다.
이런 루틴은 거창한 심리 훈련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내 삶을 바꾸는 변화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의 한 조각처럼 가볍고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평범함’이 지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게 해줬고, 꾸준함 속에서 감정을 지키는 힘이 자라났습니다.
나는 매일 같은 일터에 서서도 감정이 달라지는 나를 보며, ‘아, 나도 이렇게 유동적인 존재구나’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예민하지?”, “왜 아무것도 하기 싫지?”라고 자책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오늘은 그런 날이구나”, “지금 이 감정을 알아채줘서 고마워”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감정은 억제하거나 억지로 긍정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게 먼저였습니다.
이런 감정 루틴이 생기자, 하루의 시작과 끝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아침부터 긴장하며 하루를 시작했고, 퇴근 후에는 무기력한 채로 침대에 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 자신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낍니다. 감정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건 누군가의 이해나 허락이 아니라, 내가 나를 믿고 돌보겠다는 작지만 확고한 결심이었습니다.
4. 감정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감정을 드러내는 게 부끄럽고, 감정을 숨기는 게 익숙했던 나에게 “감정을 잃지 않고 산다”는 말은 처음엔 너무 낯설고 두려운 말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미성숙하다는 소리를 듣곤 했고, “참아야 프로다”라는 말에 익숙해져 내 감정을 검열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삶은 결국 나를 사라지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요.
감정이 살아 있다는 건, 세상의 자극에 여전히 반응할 수 있다는 뜻이고, 나를 지키며 일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감정에 휩쓸리는 대신, 내 감정을 먼저 들여다보고, 우선순위에 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감정이란 인간으로서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내 안의 ‘나’를 지켜주는 내비게이션이었습니다. 그 감정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이름 붙이고, 언어로 꺼내는 순간부터 회복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정을 숨기기보다, 감정을 들여다보는 용기를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회복’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상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웃고 무엇에 울고, 어떤 말에 상처받는지를 알 때 비로소 저는 저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감정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내 마음을 하루 한 번은 꼭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자신의 감정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의 시작이니까요.
5. 감정노동자의 회복은 ‘느려도 괜찮은 길’
예전의 나는 회복을 ‘짧고 빠르게’ 마쳐야 하는 과제처럼 여겼습니다. “아직도 그 일로 힘들어?”라는 말이, 나 자신을 더 다그치게 만들었습니다. 감정노동자로서 탈진과 지침은 반복되고,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면 다시 무너지는 나를 보며, “왜 이렇게 나는 느릴까”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회복은 정해진 속도표가 있는 마라톤이 아니었습니다. 느려도, 돌아가도, 멈춰 있어도 괜찮은 과정이었습니다.
진짜 회복은 ‘다시는 탈진하지 않겠다’는 결심보다, 탈진이 다시 왔을 때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감정이 흔들리는 날에도 스스로를 보듬는 연습, 아무 일도 하지 못한 날에도 나를 다그치지 않는 연습, 그게 회복의 실력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늘 안정적일 수 없습니다. 그 불안정함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오히려 마음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느린 회복의 길을 걷습니다. 때로는 하루 종일 감정이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한마디에 쉽게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온전히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게 진짜 회복이라고 믿습니다. 빠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남들과 같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회복해도 충분히 멋진 삶이라는 걸 저는 이제 믿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 믿음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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