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5년 6월 22일
감정노동에 시달리던 시절, 나는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견뎠습니다. 그 버팀은 마치 의무처럼 느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고통조차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었습니다. 그 버팀은 내가 나의 감정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방식이었다는 사실을요. 피곤하고 속상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억울하고 답답해도 “다들 그러고 사니까”라며 넘겼습니다. 그렇게 감정을 억누르고 참는 일이 습관이 되었고, 결국 내 마음은 메말라갔습니다. 이 글은 그런 버팀의 끝에서 마주한 깨달음—진짜 회복은 참는 힘이 아니라,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돌보는 힘이라는 사실을 이해해가는 여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내가 나를 다시 돌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1. 버티는 법은 익숙했지만, 나를 돌보는 법은 몰랐다
사실 나는 감정노동에 무너진 그 순간에도 “이 정도는 견뎌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말이기도 했고, 사회생활에서는 더더욱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고객의 언성이 높아지면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고, 동료와의 갈등이 쌓여도 애써 모른 척하며 지나갔습니다.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나답게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기술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계속된 ‘감정 연기’가 결국 진짜 나의 감정과 삶을 분리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점점 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게 되었고, 감정을 억누르며 일하는 것이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앞이 흐릿해질 정도로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듯한 하루였지만, 이상하게 더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따라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고, 혼자서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조용히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버티고 있는 거지?” 그 질문은 단순한 혼잣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진, 처음이자 가장 용기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물음이야말로 내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간 첫걸음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버티는 힘’이 아니라,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회복시키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2. 자기돌봄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는 자기돌봄을 ‘힐링 여행’이나 ‘명상 프로그램’처럼 특별한 이벤트로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그런 방식도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노동자인 나에게 자기돌봄은 그렇게 화려하거나 여유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치고 탈진한 일상 속에서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아주 작고 현실적인 선택들이었습니다. 나는 무너졌던 어느 날 이후로 삶의 방식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점심시간에도 억지로 웃지 않기로 했습니다. 억지로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나 자신에게 내린 것이죠. 퇴근 후에는 핸드폰을 끄고 조용히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중 단 몇 분이라도 내 감정을 정리하고 말로 꺼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내게 같은 질문을 건넸습니다. “지금, 너 괜찮아?” 처음엔 낯설고 쑥스러웠지만, 그 질문 하나가 내 하루의 시작을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순간부터 감정을 ‘이겨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자기돌봄이란 결국 내 감정을 다시 안아주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너무 바쁘게 살아서, 또는 감정에 무감각해져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결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이 변화들을 작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 자기돌봄의 기적이었습니다.
3. 내가 바뀌니 관계도 달라졌다
놀라운 건, 내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나를 돌보기 시작하자 주변과의 관계도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예전의 나는 업무 요청이 들어오면 습관처럼 “네”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거절하는 순간 불이익이 생기거나, 분위기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 늘 참고 수용하곤 했죠. 하지만 회복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나를 지키는 연습을 해나갔습니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지금은 어렵습니다.” 정말 작고도 단순한 한마디였지만, 그걸 입 밖에 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말을 듣고 상대는 “알겠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저는 ‘거절은 곧 갈등’이라는 오래된 믿음이 깨지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조금씩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무리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전에는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버티는 게 일상이었지만, 어느 날 한 동료가 제게 말했습니다. “요즘은 얼굴이 좀 편해졌어요.” 그 말이 그렇게 따뜻하게 들릴 줄은 몰랐습니다. 자기돌봄이 단지 내 감정을 회복시키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타인과 맺는 관계의 경계를 새롭게 짜고, 더 이상 스스로를 희생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를 세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나 하나가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 세계는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자기돌봄은 결국, 나와 관계의 방식을 함께 회복시키는 힘이었습니다.
마무리
버티는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참고 견디는 삶은 언젠가 한계에 도달하게 마련이었습니다. 진짜 회복은 인내가 아닌 ‘연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타인을 향한 연민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따뜻한 배려. “지금 괜찮니?”라는 한 문장을 스스로에게 건넬 수 있을 때, 비로소 돌봄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감정노동자로서 남을 위해 웃던 나에서, 이제는 나를 위해 말할 수 있는 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회복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작고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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